붉은 안색 (2023)
아벨은 양을 치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의 열매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벨은 처음 태어난 아기 양과 양의 기름을 바쳤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4:2-5)
창세기 4장 2에서 5절에는 신이 땅의 열매를 거부하고 아기 양과 양의 기름을 제물로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글은 해당 구절을 ‘신의 육식성’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생태적, 기독교적 관점에서 자문하여 해석하였다.
위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육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짚어보아야 한다. 생태적 관점에서 동물로서의 육식은 ‘관계 맺기’이자 공존의 한 형태이다. 육식동물의 개체수가 감소하면 결과적으로 생태적 균형이 무너져 모두가 위태로워진다. 과거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경우, 늑대가 사냥으로 인해 사라졌을 때 생물다양성을 잃고 황무지가 되었다. 사슴류인 엘크들의 개체수가 지나치게 늘어나 식물을 전부 먹어버리면서, 작은 초식동물들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늑대를 복원하자 생태계는 다시 회복되었다. 이처럼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약육강식’의 세계란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육식은 강자가 약자를 먹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관계 속에서 삶의 공간을 함께 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현대에서의 인간의 육식은 이러한 관계 맺기의 행위로 보기 어렵다. 인간의 삶의 공간은 비인간동물과 완전히 격리되어 있다. 서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생태공동체로 관계하지 않는다. 공간적 격리뿐만 아니라, 인식적 차원에서도 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인간이 먹는 돼지라는 종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산에 사는 멧돼지에게 장애를 만들어 ‘가축화’한 같은 종이다. 닭 또한 정글에 살던 ‘적색야계’로, 야생의 다른 새들처럼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으나, 인간이 이용하기 좋은 성격의 개체들을 가축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용도에 따라 장애를 만들어 지나치게 몸이 커지는 ‘육계’와 지속적으로 알을 생산하는 ‘산란계’라는 분류를 만들어 냈다. 또한 ‘젖소’라는 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젖소 또한 당연히 임신한 여성일 경우에만 젖이 나오기 때문에, 강제 임신과 출산을 반복당한다. 얼룩이 있는 소를 젖소라고 인식하도록 왜곡되었을 뿐 마찬가지로 인간에 의해 가축화된 존재이다. 인간은 동등한 관계가 아닌 위계적 위치에서, 비인간동물에게 일률적인 장애를 갖도록 만들어 ‘고기’로 물질화하고 있다. 즉, 이러한 인간의 ‘고기 먹기’는 단지 살점만이 아니라 착취된 부산물까지도 포함하는 행위이며, ‘육식성’과는 구분되는 ‘폭력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육식을 단지 고기를 먹는 행위로 이해한다면, 아벨의 제물을 받은 신은 고기와 그 폭력성을 선택한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채식 또한 모두 비폭력적이고 관계적이지는 않다.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농작물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행위 또한 생태적 관계 맺기와는 거리가 있다. 인간은 주로 자신이 서식하는 땅에서 먹이활동을 하지 않는다. 특히 도시에서 음식을 먹는 모든 과정은 거주지의 생태적 환경과 단절되어 있으며, 다른 존재의 착취에 의존하고 있다. 멀리 떨어진 땅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을 소비하며, 세계 곳곳의 서식지로부터 동물들을 내몬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은 많은 경우 이주 노동자의 노동력에 기대고 있다. 다만, 현시점에서 ‘고기 먹기’에 동원되는 착취와 견주었을 때, 조금 더 나은 선택지일 뿐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현시점에서의 채식과 육식에 적용하여 이해하기에 무리가 있다.
창세기에는 가장 먼저 신이 세계를 창조하는 일련의 과정이 서술된다. 신은 자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한 후, 이렇게 말했다.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세기 2:28). 이를 두고『동물 신학의 탐구』의 저자 앤드류 린지는 기독교적 신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존재이기에, 이 주권을 받은 인간 또한 그러한 신적 의지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힘은 ’카타바시스’ katabsis, 즉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 그들을 위한 고통 안에서 표현되므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반영한다면 지금 같은 방식의 ‘폭정’이 아닌 ‘섬김’으로 그 ‘다스림’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인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땅 위의 온갖 씨 맺는 식물과 씨가 든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그러니 너희는 그것들을 너희 양식으로 삼아라”(창세기 2:28, 29). 앤드류 린지는 저서에서 이 구절을 들어 신이 인간에게 채식을 명령했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맥락들을 고려할 때, 기독교적 신은 결코 동물을 집단적으로 소유하고, 착취하고, 살해하는 일에 기뻐하지 않는다. 창조 후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다”(창세기 2:30)고 말한 것과 같이 생태적 균형을 이루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피조세계를 누리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면, 아벨은 양을 치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다는 문장을 아벨은 양을 치는 유목 생활을 한 것으로, 가인은 농경 생활을 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아벨은 삶의 공간을 동일하게 가지는 관계 속에서 양들과 함께 이동하며 생활했기에, 폭력적으로 물질화된 현대의 고기와는 다른 맥락을 갖는다. 물론 인간 자신이 아닌, 양의 목숨을 제물로 바친 것에는 분명한 위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아벨의 제물은 단지 고기가 아닌, 관계성으로 해석해 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반면, 가인이 농작물을 바친 것은 ‘채식’의 의미로 이해할 수 없다. 땅에 농작물을 생산하고 이를 소유하는 방식은 자신이 있는 곳의 타 생명들, 즉 다른 창조물들과 관계하기보다는 물질화하는 행위에 가깝다. 따라서 신이 채식보다 육식을 선호했다는 결론보다는, 물질보다 관계성을 선택했다는 결론에 도달해 볼 수 있다. 또한 이어지는 구절에서 성경은 가인의 안색이 변했으며 이를 좋은 마음을 품지 못한 것이라고 서술한다. 이후 가인은 동생을 죽이는 살해를 행했고, 이를 통해 가인의 방식이 힘과 폭력성에 있음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인은 매우 화가 나서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왜 화를 내느냐? 왜 안색이 변하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어찌 얼굴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할 것이다. 죄는 너를 다스리고 싶어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들로 나가자”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들에 나가 있을 때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창세기 4:5-8)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했느냐? 네 동생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 나에게 호소하고 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가 흘리게 한 네 동생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아 마셨다. 그러므로 너는 이제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네가 땅을 갈아 농사를 지어도 더 이상 땅은 너를 위해 열매를 맺지 않을 것이다. 너는 땅에서 떠돌 것이다.” (창세기 4:10-12)
가인은 동생을 살해한 결과로 땅의 저주를 받는다. 땅이 더 이상 그를 위해 열매 맺지 않으며 땅에서 떠도는 것, 즉 관계의 단절이자 생태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다. 생태적 관계와 단절된 현대의 인간과 같이, 자신의 서식지에서 땅과 관계 맺고 먹고 자고, 흙으로 되돌아갈 자격을 잃은 것이다. 또한 이 대목은 마치 지금의 살처분 현장을 연상시킨다. 돼지와 닭을 살처분한 땅은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와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토양이 썩고 오염되어 회복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러한 대량 학살을 신이 ‘보시기에 좋다’고 할 리 만무하다.
결국 이 이야기는 채식과 육식에 대한 것이 아닌, 땅 그리고 타 생명과의 관계성에 대한 것이다. 신은 물질과 힘 대신 관계를 택했으나, 인간은 또다시 힘으로 폭력을 행했고, 그로 인해 관계의 단절이라는 근원적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가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가 끝난 직후, 가인이 낳은 자식들의 이름이 이어진다. (창세기 4:16-24) 지금, 현재 우리의 이름이 그 끝에 있다. 안색이 변한 가인의 얼굴에서 시작된 붉은 빛이, 아벨을 쳐 죽이는 순간에 붉은 피가 되고, 그 피를 받아 마신 붉은 땅이 되었다. 붉게 변한 땅의 저주가 여전히 가인을 향해 있다. 단절된 관계 속에서 타 생명들을 소유하고 물질화하는 방식, 이것이 아벨이 아닌 가인이 살아남은 결과이다.
도움을 준 사람: 활동가 사이
우연을 기대 (2022)
땅 위에서 연결되어 있던 개체들의 관계는 서로를 지탱한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되기에, 우연히 그 공간에 얽혀 각자의 생존을 이어가는 이들의 관계는 하나의 연대다. 개체로서도, 공동체로서도 존재는 아름답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이 아름다움은, 한번 상실되면 회복될 수 없다.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우연에 기대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상실된 것을 복구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저 우연을 기대하는 것 밖에는. 그렇게 다시, 각자의 존재가 서로의 존재의 상실을 막는 새로운 연대체가 되기를 바라며.
비어있는 땅 (2021)
오늘 우리가 딛는 모든 땅에는 소유주가 있다. 소유주는 언제든 그 땅에 삶을 꾸려온 존재들을 추방할 수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시애틀 추장,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실재하는 땅에 걸어들어가서, 살아있는 존재를 만날 때면 이 모든 것들이 결코 '소유'로 환원될 수 없음을 감각할 수 있다. 그들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서로의 기척을 느끼며 관계 맺을 때 우리는 소유에 맞서게 된다. 소유주의 이름으로 꽉 찬 땅 위에서 우리는 결코 소유될 수 없는, 비어있는 땅을 찾아낸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하는 공간, 그 곳에서 우리는 만나고 헤어진다. 그린다는 것은 그 개별적인 존재를 한 명, 한 명 기억하는 행위이다. 내가 만났던, 나를 만났던 존재들을 서술하면서, 인간이 부여한 '소유권'으로 결코 포섭될 수 없는 '공간(空間)—비어있는 틈, 사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