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Blind-Spot (2025)
아이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현장의 소식들은, 내가 그 곳에 있지 않을 때, 일상의 와중— 수업 중이거나 식사 중, 작업 중인 상황 등—에서도 일순간에 현장의 상황으로 끌어들였다. 주로 텔레그램을 통해서 공유되는데, 따라서 텔레그램이라는 메신저는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더라도, 모든 것을 중단하고 현장으로 달려가야만하는 상황을 유발하곤 했다. 텔레그램의 알림 자체가 일상을 침투하는 하나의 신호였다. 텔레그램을 통해 다른 장소에서도 현장에 연결, 동기화되어 있는 상태로 일상을 보냈다. 여러 현장의 텔레그램 방이 동시에 절망적인 소식을 공유하고, 그러한 텔레그램의 속도는 때로 고통스러웠다. 어떤 긴박함이 전해져 올지 모른다는 불안을 무릅쓰고, 가끔은 나 혼자 편해지겠다고 알림을 끄거나 무시하기도 했다. 읽지 않은 메세지는 실시간으로 쌓였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수십, 수백개가 되어있는 숫자는 그 자체로 부채감의 점수였다. 어떤 방에서 밀린 메세지가 1만개가 넘어갔을 때는 해당 현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현장에 직접 가지 않을 때, 손바닥 만한 아이폰13 기기를 통해서 현장을 보고 듣는다. 휴대폰 너머, 액정 바깥에서 현장을 본다는 것은, ’현장성’과 대비되는 일이다. ‘내가 거기에 없다는 것’, 텔레그램이 나에게 주는 고통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거기에 없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상기시키는 알람. 텔레그램으로 전해져 오는 소식들을 외면하거나, 읽을 때 느끼는 감각. 나는 액정 바깥에 있다. 화면은 너무 작고, 액정 표면에 띄워진 납작한 사진에는, 그 앞과 뒤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공유한 현장의 상황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온전히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막막함, 사진 바깥으로 잘려나간 장면들을 볼 수 없음에 대한 불안. 내가 거기에 없다. 내가 거기에 없다. 내가 거기에 없다…. 그곳으로 가야한다. 그 곳으로 가야한다. 가야한다.
텔레그램에 현장 사진이 올라오면, 즉각적으로 현장의 상황을 헤아리려한다. 얼마나 부당한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사진을 살핀다. 확대하고, 잘린 부분을 본다. 사진의 인물이 연대인인지, 당사자인지, 용역인지, 경찰인지, 정보관인지, 구청직원인지 파악이 되지 않을 때도 있고, 사진을 보고 상황을 오인할 때도 있다. 상황이 발생한 지점이 어디인지 알기 위해 배경을 들여다본다. 경찰들이 얼마나 왔는지, 여성 경찰은 왔는지, 연대인이 얼마나 모인 건지, 계고장이 붙은건지, 알고 싶다. 차 뒤에 가려진 사람은 누구인지, 잘려나간 이의 표정은 어떤지, 누군가의 얼굴에 보이는 밝은 점이 빛인지, 눈물인지, 블러 처리된 사람, 이모티콘으로 가려진 얼굴들은 내가 아는 이들 중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내가 현장에 있지 않는 이상, 전달된 사진과 영상, 메세지들은 영원히 불완전하다. 사진 바깥으로 잘려나간 장면들을 볼 수 없다는 것, 사진에 찍힌 부분들 또한 무언가에 가려지거나 흐릿하고, 왜곡된다는 것. 액정 너머에 있는 상황을 결코 온전히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파악할 수 없는 부분들. 내가 현장에 있다면 그 쪽으로 다가갔을테지만, 액정 위에서 그 부분들을 파악하기 위해 확대하면, 이미지는 흐려지고, 깨진다. 말그대로 이미지의 표면을 본다.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는 것, 카메라의 왜곡, 불분명함, 흔들림. 이미지를 보는 것은 결국 작은 핸드폰 화면, 유리로 된 액정. 그 액정을 들여다보는 순간들. 강한 햋빛 아래서 눈살을 찌푸리며, 화면의 밝기를 올린다. 화면은 온통 암실처럼 어둡고, 이미지는 겨우 보일 듯 말 듯하다. 검은 이미지 위로 내 얼굴이 보일 뿐. 불 꺼진 방에서 텔레그램을 열고 이미지를 본다. 너무 눈이 부셔서 또 눈살을 찌푸린다. 화면의 밝기를 아무리 내려도 화면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는 발광한다. 그림을 그리다 핸드폰을 본다. 액정에 물감이 튀어, 사진에 있는 점인지, 액정 위의 점인지 헷갈린다. 액정이 깨졌다. 사진 이미지 위로 곡선의 금이 보인다. 표면의 지문들이 보인다. 이미지 위로 형광등이, 창문의 프레임이 보인다. 이것이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현장에 직접 가는 나’, 활동가로서의 위치는 특수하다. 특수한 위치를 점한 채로, 나는 메신저가 되어 현장을 보여주었지만, 활동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장을 접할 일이 없거나, 모바일 미디어를 통해 현장을 지켜보고 경험하고 있다. 원한다면 실시간으로도. 확실히, 우리가 현장을 경험하는 방식은 이전과 다르다. 모바일 기기로 현장을 지켜보는 것은, 나 또한 ‘거기’에 없었던, 현장을 지켜보는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있는 감각이다.
아이폰13의 액정 (146 x 71mm) 바깥에 놓인 나의 위치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내가 직접 그곳에 있지 않았던 장소와 상황은 그리지 않았다/못했다. 핸드폰의 작고 매끈한 표면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한 무력감을 느꼈다. 전혀 다른 공간에 서있는 내가, 그곳으로 달려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그 일에 대해서 그리거나 말할 수 없었다. 즉, 내가 현장에 있지 않았을 때, 나는 그 순간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모바일 기기를 통해 현장을 지켜보는 일은 유리창 너머로 현장을 관조하는 위치에서 바라본 것이며, 그런 위치에서는 말할 수 없거나, 말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었다. 유리창 바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내가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재현하는 방법뿐일 것이며,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많은 이유들로 연대하던 현장들에 이전처럼 가지 못하게/ 않게 된 지금 나는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 그 순간에 액정 너머에 있었다는 사실, 그런 나의 무력한 위치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밖에 그릴 수 없다.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불완전하고, 막연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무력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말을 찾는다.
포인트 니모 (2025)
《포인트 니모》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전 작업들과 다른 시도들이 있었다. 그동안의 작업에서는 주로 현장의 인물과 사물 등의 대상을 가까이서 주목하는, 혹은 현장의 상황에 휘말린 내부적 시선으로 접근해왔다. 하지만 동시에 연대 현장이 아닌 폐허로, 폐축사랑 폐도살장을 다니면서, 한편으로는 대상도 상황도 모두 사라진 공간(풍경)을 어떻게 그릴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한참을 떠나, 걷고 또 걷고, 무성한 풀들을 헤치고 철창을 넘어 찾아 들어간 곳, 숨죽이며 침입한 곳, 황급히 숨어들어간 곳, 폐돈사와 폐도살장 이 곳, 저 곳을 살폈다. 비질(Vigil)로 도살장에 갈 때 만나던 돼지들의 열기, 들려오던 비명소리가 없는, 그 고요한 곳에 가만히 붙어있는 ‘소음발생구역 귀마개착용‘이라는 경고문으로, 그 곳 또한 찢어질 듯한 비명이 있었음을 짐작했다.
그 곳을 거쳐간 모든 당사자가 죽었다. 단 한 명도 생존자도 남아있지 않아 울음소리조차 진술할 수 없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풍겨오는 미세한 오물과 피 냄새, 혹은 숨이 막힐 듯한 악취, 그리고 바닥의 표면에 새겨진 흔적들을 보았다. 계류장 바닥에 오래되어 말라붙은 오물들, 도살장 바닥에 쌓여있는 무수한 털들과 발톱들, 오랜 시간 피가 고여 붉게 변한 콘크리트 바닥의 틈, 폐쇄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부글 부글 끓고 있는 돈사 바닥의 오물과 구더기들, 도살된 이들의 수를 매일 기록한 버려진 서류.
이 풍경들은 도시에 사는, 멀리서 착취하는 우리의 깨끗하고 세련된 공간들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풍경을 그리는 것이 평면 위에 공간을 재현하여 환영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면, 그로써 마치 그 공간에 온 듯한 착각을 주는 것이라면, 그 기능을 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려진 풍경 위로, 혹은 아래로, 해당 공간의 바닥 표면을 그리거나 새겼다. 환영을 훼손하여, 전시장 앞에 선 우리를 그림 속 공간으로 초대하기를 거부하고 싶었다. 그림을 바늘고 긋고, 뜯어내고, 오물과 핏자국을 얹었다.
나는 우리가 그토록 멀리 처박아둔 풍경을, 여러분 앞에 대신 소환하기 위해 거미줄과 먼지, 가시를 헤집고 한참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세련된 모습으로 찾아온 당신은, 그림 속 공간이 아닌, 그림 밖에, 도시의 전시장 속에, 여기에 서있다고, 나는 그림으로 당신을 매혹시킬 생각이 없고, 당신은 평면을 마주보고 있을 뿐이라고 명시하려 했다.
이번 작업들은 이런 시도를 서툴게나마 실험해 본 결과이며,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는 내 손을 떠난 일이지만, 어찌되었든 지금은 이런 방식을 빌어, 아무도 그리지 않은 채, 무수한 이들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그저 함께 슬퍼하고 싶을 뿐이에요 (2024)
화재로 250명(命)의 돼지가 죽었다는 기사를 보고 충남의 한 돈사에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마을 주민에게 물어 이장을 만났고, 그는 농장주를 불러 해당 축사로 안내했다. 축사가 있던 자리에는 타버린 잔해와 아기 돼지 두 명의 사체만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마치 잠든 것처럼 검게 그을린 채 웅크려있었다. 수백 명의 돼지 시신은 이미 사체 처리 업체에서 모두 가져갔다고 했다. 업체에서는 사체를 어딘가에 이용하는 모양이었고, 너무 작은 사체와 뼈, 살 조각들은 쓸모가 없어 가져가지 않은 듯했다.
농장주는 ‘서울에서부터 이곳까지 온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검은 복장을 입고 갔던 나와 동료는 단지 죽은 돼지들을 애도하기 위해 왔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피해를 호소하며 화재 현장으로 선뜻 안내했전 농장주는, 갑자기 말을 바꾸어 ‘돼지 축사가 한두 개도 아니고, 이거 하나 탔다고 큰 일도 아니다’라며 우리를 내쫓으려 했다. 단지 돼지를 애도하기 위해 여기까지 올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슬픈 사람은 저희에요. 선생님들보다, 슬픈 사람은 저희에요.”
"같이 슬퍼하고 싶은 거예요, 저희는."
"그러니까 슬픈 사람은, 예를 들어서 제가 백 프로 슬프면은, 선생님들은 구십구 프로 밖에 더 슬프겠어요. 근데 왜 당사자한테 와서 자꾸 그래요. 그 잃은 슬픔은 제가 더 많잖아요.”
그는 애도할 자격을 '당사자'라는 이름으로 나누었지만, 250명의 사람이 죽었다면, 우리는 공적으로 애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공동체는 돼지를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기에 그저 경제적 손실로, 숫자로만 남을 뿐이다. 정치적인 타자들의 이름은 부고란에 오르지 않는다. 이들을 추모하는 것은 너무나 정치적이어서 때로는 비웃음과 조롱, 폭력이 수반된다. 우리는 이들의 죽음을 추모할 자격을 박탈당한다. 이는 슬픔의 위계를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작은 시신 둘을 그냥 떠나올 수가 없었다. 현장에서 쫒겨난 뒤, 시내에 가서 두 아기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를 계획을 세웠다. 조용히 화재 현장에 돌아가 두 시신을 거두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사실 이것이 법적으로 어떤 각오를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저녁 무렵 다시 현장으로 향했지만, 차를 세우고 내리는 순간 농장주를 마주쳤다. 그는 다시 돌아온 우리를 보고 화가 나 차 키를 빼앗고 경찰을 불렀다. 아기 돼지들은 이미 버려지고 없었다.
경찰들이 오자 우리의 목적을 되물었고, 우리는 그저 애도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사람'의 입장에서만 생각한다면, 누구나 이 행동을 무례하게 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을 무릅 쓴 애도인지 알고 찾아간 마음은 한없이 더 무거웠다. 피해를 입은 농장주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소유물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다.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화재 현장의 먼발치에서, 경찰 네 명과 농장주 사이에서 고개를 숙여 눈을 감고 묵념했다.
영화 <사울의 아들>에서 사울은, 아우슈비츠 안에서 한 소년의 주검을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를 애도하기 위해 집요하게 랍비를 찾아다니고, 묻어주기 위해 시신을 몰래 빼내는 등 위험을 무릅쓴다. 수백만 명이 죽어간 비르케나우에서 단 한 명의 소년을 애도하기 위해서 말이다. ‘제대로’ 애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무릅쓰는, 그의 맹목적인 행동은 비이성적으로 보인다. 나는 사울처럼, 수천, 수만의 쏟아지는 주검들 속에서 단 한 명이라도 ‘제대로’ 애도하고자 했다. 애도는 정치적인 일이다. 공동체가 누구를 배제해왔는가에 대한 감각을 깨우치는 행위이다. 애도는 공동체가 승인하는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제된 이의 죽음을 끝까지 애도하는 것은 공동체에 저항하는 행위가 된다.
경찰들은 우리를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다고 말하고, 농장주는 내쫒겠다고 하는 상황 속에서 조용히 묵념을 하자 그들은 잠시 기다렸다. 그 후에 농장주는 — 처음에는 안된다고 했던 — 자리를 펴고 애도를 하는 행위도 얼마든지 할 거면 하라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묵념으로 애도를 마치고, 죄송하다는 인사와 함께 돌아섰다. 두 아기의 시신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그들의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것에 무력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경찰과 농장주에게 애도의 자격에 대해서 논하고, 부딪혔다.
그 날, “우리는 그저 함께 슬퍼하고 싶을 뿐이에요”라는 말이 만들어 낸 작은 균열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전시는 화재 현장에서 끊임없이 말했던 이 문장으로부터 출발한다. 3년 전 그 날 이후로도 숱하게 죽어간 타자들의 죽음 앞에서 애도하고, 또 애도했다. 절을 하고, 기도를 했다. 종이로 만든 국화를 들고, 때로는 조화, 생화를 들었다. 마이크를 잡고 발언을 했고, 집회를 하고 기자회견을 했다. 분향소를 세웠다. 말없이 횡단보도를 반복해서 건넜고, 비를 맞으며 바닥에 쓰러져 누웠다. 눈을 감아 묵념을 했고, 울었으며, 주저앉았다. 함께 노래했다. 피켓을 들었다. 그림을 그렸고, 글을 썼다. 포스트잇을 붙였다. 검은 옷을 입었다. 리본과 뱃지를 달았다. 이 모든 몸짓들로 존재들을 떠나보내던 순간을 기억한다.
비인간 동물과 비국민, 철거민, 퀴어, 홈리스, 장애인, 여성, 노동자 등 정치적 타자들을 애도하며, 공적인 애도의 대상을 확장해나가는 저항의 몸짓들…. 이러한 애도의 몸짓들을 그린 일련의 그림은 함께 슬퍼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작가는 관객들이 몸짓들에 새겨진 애도의 감각을 통해, 각자의 기억 속 죽음들을 무형의 장으로 불러내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공동의 기억으로서 확장되는 애도의 장을 마련하려 한다.
붉은 안색 (2023)
아벨은 양을 치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의 열매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벨은 처음 태어난 아기 양과 양의 기름을 바쳤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4:2-5)
창세기 4장 2에서 5절에는 신이 땅의 열매를 거부하고 아기 양과 양의 기름을 제물로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글은 해당 구절을 ‘신의 육식성’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생태적, 기독교적 관점에서 자문하여 해석하였다.
위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육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짚어보아야 한다. 생태적 관점에서 동물로서의 육식은 ‘관계 맺기’이자 공존의 한 형태이다. 육식동물의 개체수가 감소하면 결과적으로 생태적 균형이 무너져 모두가 위태로워진다. 과거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경우, 늑대가 사냥으로 인해 사라졌을 때 생물다양성을 잃고 황무지가 되었다. 사슴류인 엘크들의 개체수가 지나치게 늘어나 식물을 전부 먹어버리면서, 작은 초식동물들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늑대를 복원하자 생태계는 다시 회복되었다. 이처럼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약육강식’의 세계란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육식은 강자가 약자를 먹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관계 속에서 삶의 공간을 함께 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현대에서의 인간의 육식은 이러한 관계 맺기의 행위로 보기 어렵다. 인간의 삶의 공간은 비인간동물과 완전히 격리되어 있다. 서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생태공동체로 관계하지 않는다. 공간적 격리뿐만 아니라, 인식적 차원에서도 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인간이 먹는 돼지라는 종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산에 사는 멧돼지에게 장애를 만들어 ‘가축화’한 같은 종이다. 닭 또한 정글에 살던 ‘적색야계’로, 야생의 다른 새들처럼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으나, 인간이 이용하기 좋은 성격의 개체들을 가축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용도에 따라 장애를 만들어 지나치게 몸이 커지는 ‘육계’와 지속적으로 알을 생산하는 ‘산란계’라는 분류를 만들어 냈다. 또한 ‘젖소’라는 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젖소 또한 당연히 임신한 여성일 경우에만 젖이 나오기 때문에, 강제 임신과 출산을 반복당한다. 얼룩이 있는 소를 젖소라고 인식하도록 왜곡되었을 뿐 마찬가지로 인간에 의해 가축화된 존재이다. 인간은 동등한 관계가 아닌 위계적 위치에서, 비인간동물에게 일률적인 장애를 갖도록 만들어 ‘고기’로 물질화하고 있다. 즉, 이러한 인간의 ‘고기 먹기’는 단지 살점만이 아니라 착취된 부산물까지도 포함하는 행위이며, ‘육식성’과는 구분되는 ‘폭력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육식을 단지 고기를 먹는 행위로 이해한다면, 아벨의 제물을 받은 신은 고기와 그 폭력성을 선택한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채식 또한 모두 비폭력적이고 관계적이지는 않다.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농작물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행위 또한 생태적 관계 맺기와는 거리가 있다. 인간은 주로 자신이 서식하는 땅에서 먹이활동을 하지 않는다. 특히 도시에서 음식을 먹는 모든 과정은 거주지의 생태적 환경과 단절되어 있으며, 다른 존재의 착취에 의존하고 있다. 멀리 떨어진 땅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을 소비하며, 세계 곳곳의 서식지로부터 동물들을 내몬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은 많은 경우 이주 노동자의 노동력에 기대고 있다. 다만, 현시점에서 ‘고기 먹기’에 동원되는 착취와 견주었을 때, 조금 더 나은 선택지일 뿐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현시점에서의 채식과 육식에 적용하여 이해하기에 무리가 있다.
창세기에는 가장 먼저 신이 세계를 창조하는 일련의 과정이 서술된다. 신은 자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한 후, 이렇게 말했다.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세기 2:28). 이를 두고『동물 신학의 탐구』의 저자 앤드류 린지는 기독교적 신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존재이기에, 이 주권을 받은 인간 또한 그러한 신적 의지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힘은 ’카타바시스’ katabsis, 즉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 그들을 위한 고통 안에서 표현되므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반영한다면 지금 같은 방식의 ‘폭정’이 아닌 ‘섬김’으로 그 ‘다스림’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인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땅 위의 온갖 씨 맺는 식물과 씨가 든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그러니 너희는 그것들을 너희 양식으로 삼아라”(창세기 2:28, 29). 앤드류 린지는 저서에서 이 구절을 들어 신이 인간에게 채식을 명령했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맥락들을 고려할 때, 기독교적 신은 결코 동물을 집단적으로 소유하고, 착취하고, 살해하는 일에 기뻐하지 않는다. 창조 후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다”(창세기 2:30)고 말한 것과 같이 생태적 균형을 이루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피조세계를 누리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면, 아벨은 양을 치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다는 문장을 아벨은 양을 치는 유목 생활을 한 것으로, 가인은 농경 생활을 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아벨은 삶의 공간을 동일하게 가지는 관계 속에서 양들과 함께 이동하며 생활했기에, 폭력적으로 물질화된 현대의 고기와는 다른 맥락을 갖는다. 물론 인간 자신이 아닌, 양의 목숨을 제물로 바친 것에는 분명한 위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아벨의 제물은 단지 고기가 아닌, 관계성으로 해석해 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반면, 가인이 농작물을 바친 것은 ‘채식’의 의미로 이해할 수 없다. 땅에 농작물을 생산하고 이를 소유하는 방식은 자신이 있는 곳의 타 생명들, 즉 다른 창조물들과 관계하기보다는 물질화하는 행위에 가깝다. 따라서 신이 채식보다 육식을 선호했다는 결론보다는, 물질보다 관계성을 선택했다는 결론에 도달해 볼 수 있다. 또한 이어지는 구절에서 성경은 가인의 안색이 변했으며 이를 좋은 마음을 품지 못한 것이라고 서술한다. 이후 가인은 동생을 죽이는 살해를 행했고, 이를 통해 가인의 방식이 힘과 폭력성에 있음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인은 매우 화가 나서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왜 화를 내느냐? 왜 안색이 변하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어찌 얼굴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할 것이다. 죄는 너를 다스리고 싶어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들로 나가자”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들에 나가 있을 때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창세기 4:5-8)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했느냐? 네 동생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 나에게 호소하고 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가 흘리게 한 네 동생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아 마셨다. 그러므로 너는 이제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네가 땅을 갈아 농사를 지어도 더 이상 땅은 너를 위해 열매를 맺지 않을 것이다. 너는 땅에서 떠돌 것이다.” (창세기 4:10-12)
가인은 동생을 살해한 결과로 땅의 저주를 받는다. 땅이 더 이상 그를 위해 열매 맺지 않으며 땅에서 떠도는 것, 즉 관계의 단절이자 생태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다. 생태적 관계와 단절된 현대의 인간과 같이, 자신의 서식지에서 땅과 관계 맺고 먹고 자고, 흙으로 되돌아갈 자격을 잃은 것이다. 또한 이 대목은 마치 지금의 살처분 현장을 연상시킨다. 돼지와 닭을 살처분한 땅은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와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토양이 썩고 오염되어 회복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러한 대량 학살을 신이 ‘보시기에 좋다’고 할 리 만무하다.
결국 이 이야기는 채식과 육식에 대한 것이 아닌, 땅 그리고 타 생명과의 관계성에 대한 것이다. 신은 물질과 힘 대신 관계를 택했으나, 인간은 또다시 힘으로 폭력을 행했고, 그로 인해 관계의 단절이라는 근원적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가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가 끝난 직후, 가인이 낳은 자식들의 이름이 이어진다. (창세기 4:16-24) 지금, 현재 우리의 이름이 그 끝에 있다. 안색이 변한 가인의 얼굴에서 시작된 붉은 빛이, 아벨을 쳐 죽이는 순간에 붉은 피가 되고, 그 피를 받아 마신 붉은 땅이 되었다. 붉게 변한 땅의 저주가 여전히 가인을 향해 있다. 단절된 관계 속에서 타 생명들을 소유하고 물질화하는 방식, 이것이 아벨이 아닌 가인이 살아남은 결과이다.
도움을 준 사람: 활동가 사이
우연을 기대 (2022)
땅 위에서 연결되어 있던 개체들의 관계는 서로를 지탱한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되기에, 우연히 그 공간에 얽혀 각자의 생존을 이어가는 이들의 관계는 하나의 연대다. 개체로서도, 공동체로서도 존재는 아름답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이 아름다움은, 한번 상실되면 회복될 수 없다.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우연에 기대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상실된 것을 복구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저 우연을 기대하는 것 밖에는. 그렇게 다시, 각자의 존재가 서로의 존재의 상실을 막는 새로운 연대체가 되기를 바라며.
비어있는 땅 (2021)
오늘 우리가 딛는 모든 땅에는 소유주가 있다. 소유주는 언제든 그 땅에 삶을 꾸려온 존재들을 추방할 수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시애틀 추장,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실재하는 땅에 걸어들어가서, 살아있는 존재를 만날 때면 이 모든 것들이 결코 '소유'로 환원될 수 없음을 감각할 수 있다. 그들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서로의 기척을 느끼며 관계 맺을 때 우리는 소유에 맞서게 된다. 소유주의 이름으로 꽉 찬 땅 위에서 우리는 결코 소유될 수 없는, 비어있는 땅을 찾아낸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하는 공간, 그 곳에서 우리는 만나고 헤어진다. 그린다는 것은 그 개별적인 존재를 한 명, 한 명 기억하는 행위이다. 내가 만났던, 나를 만났던 존재들을 서술하면서, 인간이 부여한 '소유권'으로 결코 포섭될 수 없는 '공간(空間)—비어있는 틈, 사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